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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08일
독이 든 닭고기 수프

독이 든 닭고기 수프




벨 팅커1) 그녀는 분명 일부러 피터팬 앞에서 독을 마셨을 것이다. 네버랜드에서 바뀐 것은 오직 그녀 뿐이었고 그녀는 어찌 됐든 네버랜드를 바꿔 버리려고 피터팬에게 죽음의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독을 마신 것이리라. 하지만 최종 피해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벨 팅커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바뀐 사실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최대 수혜자는 '독이 든 닭고기 수프'2) 이다. 원래라면 닭고기 수프는 나올 리가 없는 것이었다. 웬디가 날아 내려온 그날 만찬의 요리 종류조차 언급에 없거늘, 하물며 일개 닭고기 수프야 오죽 하겠는가. 그러나 너 '독이 든 닭고기 수프', 너야 말로 뜬금없이 등장해 일순간 주연급의 주목을 받은 최대 수혜자임에 틀림없다. 간사한 닭고기 수프.

그러던 차에 벨은 노크를 한 후 저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집에는 돈 한푼 없건만 내가 폐렴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저녁은 친절하게도 닭고기 수프다.

왠지, 닭고기 수프가 보랏빛으로 보인다.

"있잖아, 벨. 내가 이걸 먹는 걸로 닭고기 수프는 최대 수혜자가 되는 걸까?"

"뭔 소리야?"

굉장히, 황당한 표정을 하고 벨이 나를 바라본다. 사뿐히 무시한 채 나는 스푼을 든다.

지금 나는 벨 팅커, 너는 독이 든 닭고기 수프다. 네버랜드에서 수프에 독을 탄 건 벨 팅커였지만 피해자의 위치 따위, 바뀌면 좀 어떠냐? 나는 지금, 독 수프를 마시는 벨 팅커가 된다. 독을 마시는 기분으로……. 독을 마시는 기분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그리고 피터팬이 어차피 심심해서 어딘가의 아주 예쁜 여자아이와 딸린 동생 둘을 데려 올 예정이었다면, 벨 팅커는 어차피 그녀에게 살해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소녀가 오던 그녀의 이름은 웬디이다. 왜냐하면, 결국 온 그녀의 이름이 웬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웬디는 날 살해하러 온다. 그러니까 내가 자살하지 않으면 웬디는 날 죽일 것이다.

"하지만 난 독이 든 닭 수프를 마셨을 텐데!"

하지만 그래서? 피터는 공포를 느꼈나? 네버랜드는 티끌이라도 바뀌었나?

'랄까 넌 죽었니? 벨- 팅커?'

뭐?

내가,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벨 팅커는 죽었는데? 그럼 난 뭐지? 난 벨 팅커가 아냐?

"욱, 우웁!"

갑자기 배알이 뒤틀리더니, 세상 끝까지 역겨워져 한껏 구토했다. 토사물은 왠지 연노랑이 섞인 듯 한 보라색……. 아아, 내가 지금까지 먹은 것이 그것 하나밖에 없다.

독이 든 닭고기 수프.

"안녕, 얼간이? 네가 정말 날 먹었다고?"




순간 웬디가 경련을 하더니 일순간 몸이 솟아올라 없는 속에 구토를 했다. 오, 하느님……. 언제까지 이 아이를 괴롭히실 건가요? 얼른 가서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상체를 받쳐 천천히 눕힌다. 에휴, 신 내. 그래도 옷에는 안 튀어서 다행이네. 토사물이 묻은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올린다.

얘는 그 와중에도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웬디? 웬디야? 아퍼? 괜찮은 거야?"

"뭐?"

순간 웬디가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본다.

"다시 말해봐."

"아, 아퍼? 괜찮냐고"

"그 전에!"

"……. 에? 에……. 웬디야, 괜"


"내가 웬디라고? '나를 죽이려는 웬디' 가 '나' 라고?"


"아,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웬디? 빨리 자는 게 좋겠어. 새 이불 들고 올 테니까 누워서 기다려."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웬디를 방에 두고 나는 옆방에 새 이불을 들러 갔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안 것은 옆 방 이불장을 연 순간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

머리가 미칠 듯이 뜨거워져 버려 나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폐렴만큼 식어버린 이 대기가, 이 돌바닥이 그 화기를 앗아가도록.

'내가 웬디라고? 내가, 웬디라고? 말도 안돼. 나는 벨 팅커, 독이 든 닭고기 수프를 먹고 죽은 최대 최악의 피해자야!'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왠지 숨이 더 막히는 것 같다.

"아니면, 수프가 부족했던 거야? 수프를 더 먹으면 나는 벨 팅커가 될 수 있을까?"


순간, 일그러진 세상의 중심에 놓인 단 하나의 곧은 길이, 내게 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양의 '독이 든 닭 수프'였다. 그것은 왠지 일전보다 더 검보랏빛으로 보인다.

그것은 너무나도 넓어 달이 창백히 반사되며 모두의 꿈과 희망이 담긴 색색의 조미료가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그리고 나는 수프에 뛰어들었다. 이걸로 나도 벨 팅ㅋ

"켁"


웬디의 손이 내 목을 졸랐다.




내가 웬디를 찾은 건 하루 뒤였다. 웬디는 어디에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익사한 채 인근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난 그것이……. 3일 전의 이야기가 자살 전조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만 적어도 구토를 한 후에 혼자 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날, 돌아오자마자 나는 닭고기 수프를 버렸다.

그 녀석은 평범한 닭고기 수프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독이 든 닭고기 수프' 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최대 수혜자 역시 '독이 든 닭고기 수프' 임에 틀림없다.

이 간사한 '독이 든 닭고기 수프'.




1) 원문은 닭고기.

2) 원문은 팅커벨.

# by prismatic | 2008/05/08 22:0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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